[영화] <백년의 기억>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과의 화상 Q&A

기사입력 2020.06.08 15:02 조회수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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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한반도 격랑의 백 년을 다룬 다큐멘터리 <백년의 기억>65일 금요일 14시 에무시네마 1관에서 언론/배급 시사회 이후 화상으로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과의 기자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한반도의 문제는 우리에겐 떼어놓을 수 없는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인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선이 아닌 제3자의 시선으로 한반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백년의 기억>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과 인터뷰 전문을 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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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기억>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과의 화상 Q&A

 

 

 

Q: <백년의 기억> 이전에도 한반도와 관련된 영화 두 편을 찍었습니다. 한반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지금 감독님에게 한반도는 어떤 의미입니까?

A: 우선 개인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80년대에 한국 아이 두 명을 입양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형제가 한국에서 온 입양아이긴 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가 익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90년대 유럽 공영채널(ARTE)에서 (방송기자로) 근무를 시작하며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00년 김정일과 김대중이 만났을 때, 채널(ARTE)에서 제게 한반도와 관련된 작업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2003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그다음 해인 2004년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이전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한반도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Q: 출입이 쉽지 않은 북한에서 촬영과 인터뷰를 진행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작업할 수 있었나요?

A: 2004년에 기자 신분으로 북한을 오갈 때는 출입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가장 힘든 일은 북한의 신뢰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인 작업을 하려 한다고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외국인(서양인)에 대한 불신이 짙어 신뢰를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북한 고위층의 인터뷰를 촬영하기 위해 신뢰 관계를 쌓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Q: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한국의 고유한 스포츠이자 무예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태권도를 각 장을 나누는 코드로 사용했습니다. 어디에서 남북의 태권도에 관련된 정보를 얻고 비교하며 공부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로, 영화의 불문 원제는 무엇인가요? 한국에서 <백년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A: 우선 태권도에 관해서는, 북한의 태권도와 세계적 표준으로 채택되고 있는 한국의 태권도 두 가지를 굉장히 흥미롭게 관찰하고 연구했습니다. 사실 태권도라는 전통 무예를 사용한 이유는 영화 자체가 이데올로기 싸움, 어떻게 보면 실제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분쟁/전쟁이라는 상황에 무예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럽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고려단군같은 태권도의 움직임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알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태권도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불문 원제는 영제와 동일하게 한반도, 백년의 전쟁”(Corée, la guerre de cent ans/ Korea, a hundred years of war)입니다. 그러나 한국 관객에게 소개할 때에는 한국의 상황에 맞게 조금 바꾸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백년의 기억으로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Q: 태권도와 관련된 추가 질문입니다. 태권도 표준 품새에는 주체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세부적인 내용을 알고 사용하신 건가요?

A: 태권도 품새가 나오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두 가지 동작만은 한국에서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주체였고, 두 번째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나라에서 촬영하게 됐습니다. 태권도만으로도 이런 문제가 생겼는데, 더 심각한 주제에 대해서는 제가 남북을 오가며 만났을 문제가 짐작되시리라 생각합니다.

 

Q: 남북문제에 깊이 얽혔던 프랑스인으로 장 자크 그로하 씨가 있습니다. 관련된 취재를 했거나 할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볼 한국 관객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나요?

A: 말씀해주신 장 자크 그로하 씨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한반도 이슈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수 있었던 배경을 부연 설명하자면, 프랑스에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상당히 잘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독일의 공영방송 채널인 아르떼(ARTE)는 국제 이슈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제작을 많이 지원합니다. 저 또한 그 지원을 받아 <백년의 기억>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르떼(ARTE)는 독일에도 방영되기 때문에 더욱 한반도의 분단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년의 기억>을 찍을 때 한국에서 개봉하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실제로 개봉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 관심을 가지고 와주신 분들과 개봉을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국과 북한뿐만 아니라 유럽, 프랑스 등에서도 모두 분단의 비극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비극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는 특별히 북한에 직접 가서 취재하고 북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담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한반도 이슈를 더 잘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북한이 서로를 이해하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와 영상을 통해 (여러분이) 서로 다른 남북한의 문화를 아주 조금이라도 접할 수 있다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한국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조금 더 이해의 폭을 넓힌 다음 어떤 길을 걸어 나갈지는 그들의 선택에 달려 있겠지요.

 

Q: 영화 굉장히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통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조금은 냉철하고 비관적인 결론을 마지막에 보여주면서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그럼에도 남북한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모습을 담아서 희망을 남겨준 것 같습니다. 3자의 시선에서 볼 때, 남북한 통일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본인은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A: 비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남북통일에 대한 희망에 찬 순간이 많았음에도 남북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그 희망이 실현되지 않는 것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남북한의 미래에 관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남한과 북한의 직접적인 대화입니다. 남북의 이슈만으로도 너무나 복잡한 상황이 주변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강대국들이 남북간 대화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남북한의 문제가 전 세계의 관심사이다 보니 그 나라들을 빼놓을 수는 없겠죠. 고래 사이에 낀 새우 같은 상황에서도, 저는 남한과 북한이 직접 대화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Q: 기대보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서양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찍은 영화들 중에는 관광상품 같은 영화도 많았습니다. 그런 영화들과는 달리, 전쟁부터 분단으로 이어져 온 역사를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가며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아냈다는 것을 굉장히 좋게 보았습니다. 영화의 프로듀서인 크리스틴과의 협업 과정에 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크리스틴은 전 세계의 분쟁지역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분단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 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는지 동기가 궁금합니다.

A: 말씀해주신 것처럼 크리스틴은 분쟁지역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여러 편 제작했습니다. 특히 파키스탄이나 사우디아라비아같이 정치적으로 중요하지만, 대중에게 그 역사가 익숙하지 않은 지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죠. 크리스틴과는 <평양 유랑>을 제작하며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그 작업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더 깊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백년의 기억>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Q: 추가로 차후 작업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A: 당장 한국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계획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백년의 기억>이 한국 관객을 많이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2차 세계대전 전 유럽의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평양 유랑>이라는 제 다른 다큐멘터리도 한국에서 개봉하거나 관객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너무나 좋을 것 같습니다.

 

Q: 두 영화(<백년의 기억><평양 유랑>)가 모두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평양 유랑>에 관해서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우선 오늘은 <백년의 기억>을 보고 질문을 주시는 자리이기 때문에 <평양 유랑>과 혼선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년의 기억>2010년 시작된 프로젝트로, 2019년까지 진행됐습니다. 역사가들의 목소리와 아카이브의 귀한 자료,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입장을 다루는 진지한 다큐멘터리죠. 이 작업을 하며 실제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아르떼 채널(ARTE)에서 <평양 유랑>을 제작하게 됐습니다. 2019DMZ영화제에서 소개되었죠. 이 영화는 평양뿐 아니라 근교 도시에서 북한 주민들이 살아가는 이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백년의 기억>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진지한 작업이라면, <평양 유랑>은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입니다.

 

Q: 영화에 매우 많은 아카이브 필름이 활용되었습니다. 그 아카이브 자료를 어떻게 구했는지, 북한에서 구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는지 궁금합니다.

A: 아카이브 자료는 전 세계에서 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북한, 미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 등에서 구했습니다. 북한 자료는 북한이 아닌 나라에서 구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미국에서요.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의 촬영 자료 등은 미군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캄보디아 왕의 평양 망명 자료는 프랑스에 촬영본이 있었습니다. 일부 자료는 북한에서도 제공받았습니다. 북한에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제작하기까지 북한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북한의 신뢰를 얻고 영화 촬영을 승인받은 이후로는 협력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덕분에 영화가 잘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관해 북한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영화에 5분 정도만 들어간다고 하면서 왜 한 시간 반이나

[최혜경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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