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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팝아티스트 바스키아의 주요 작품 150여 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지난 10월 8일부터 열리고 있다.
1960년대부터 가속화된 산업화에 따라 미국 전역에는 상품 판매를 위한 신문, 잡지 등의 인쇄물들과 코믹북, 텔레비전, 영화 등 대중매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미디어에 기반한 이미지들은 도시의 시각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에 따라 대량생산과 복제의 방식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예술 경향이 나타나면서 1970년대 후반 뉴욕 미술계는 서로 다른 예술 경향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미니멀리즘과 형식을 거부하고 작가의 사고 자체가 작품이 되는 개념미술은 새로운 시각문화의 큰 축을 형성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팝 아트는 영화, 광고,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차용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또한 힙합과 그래피티 등 도시를 배경으로 성장한 거리 예술이 붐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 등이 혼합된 실험적 예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수작업을 극도로 배제하고 규격화된 산업재료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미니멀리즘과 실크스크린, 사진, 복사 등 대량생산 기법을 도입해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팝아트가 미술계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팝아트는 미국 문화를 지배하는 물질만능주의를 거부하기보다는 소비문화를 찬양하면서도 조롱하는 양면적 가치를 띠며 상업미술과 소비문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앤디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유명인들의 초상 작업을 대량으로 제작했으며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uerg)는 실제 사용하는 물건들을 화면에 붙여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뉴욕은 상업 미술과 소비문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발원지로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예술과 유행을 창조하는 거대한 실험실이 되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b. 1960-1988)는 시작과 동시에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르며 지금까지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공화국(Republic of Haiti)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78년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하던 바스키아는 이러한 대안공간에 머물며 예술을 실험하고, 소호와 이스트 빌리지 등지에 그래피티를 남겼다. SAMO©는 십대들의 장난처럼 시작됐지만, 그 속에는 주류 미술계와 사회를 향한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무질서하게 휘갈겨 쓴 듯한 글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미지와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사회 전반의 모순적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조롱하는 강력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바스키아는 키스 해링(Keith Haring)과 케니 샤프(Kenny Scharf)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회화 작업으로 옮겨가고 SAMO©를 작품 안에 서명처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바스키아는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바스키아는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와 《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 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고,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잡지 『아트 포럼 Art Forum』에 「더 레이디언트 차일드 The Radiant Child」 라는 기사로 소개되어 명실상부 미술계 슈퍼 루키로 등장한다. 새로운 예술가를 발굴하려는 신생 갤러리들은 바스키아의 독보적인 행보에 주목했으며, 바스키아는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 7 Kassel Documenta 7》에 작품을 출품하며 뉴욕을 넘어 전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전시를 개최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새로운 시각예술의 형태이자, 모든 가치를 대체하는 바스키아의 SAMO©는 자신을 알리는 로고이자 브랜드로서 이후 작품 활동에 근간이 되었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을 존경했던 바스키아는 1982년, 앤디 워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과 인사를 나눈 뒤 작업실로 돌아가 워홀의 초상화를 그리고 바로 다시 가져와 워홀에게 보여주었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바스키아는 워홀을 의지하고 존경했으며 워홀에게 바스키아의 젊은 에너지는 새로운 예술적 동력이 되었다. 1983년 바스키아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비쇼프버거의 제안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 워홀과 협업한 전시를 개최한다. 하지만 1985년 워홀과 함께한 전시가 미술계의 혹평을 받으면서 워홀과의 공동작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들은 1985년까지 2년간 15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공동으로 제작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고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으로 방문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방문을 엿새 앞둔 8월 12일 유명을 달리한다. ‘거리의 이단아’에서 ‘세계 화단의 유망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는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000여 점이 넘는 드로잉, 회화와 조각작품을 통해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대변하는 문화 전반의 아이콘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하는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그리고 사진 작품 등 150 여점을 선보인다. 먼저, 뉴욕 거리에서 시작된 SAMO© (세이모)시기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중심으로 바스키아의 초창기 예술세계를 시작으로 창조한 영웅의 다양한 도상과 초상화를 통해서 삶과 죽음, 폭력과 공포, 빛과 어두움이 투영된 시대상과 인간 내면의 원초적 모습을 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제작 방식이자 구성요소인 텍스트와 드로잉, 콜라주와 제록스 기법이 혼합된 작품들을 통해서, 함축적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이미지들이 생성되는 과정뿐 아니라 앤디 워홀과 함께한 대형 작품을 전시해 서로 다른 두 거장이 교류하며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 예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창조함으로써, 현재까지도 삶의 부조리한 가치에 의문을 던지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누구보다 긴 여운을 남긴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2021년 2월 7(일)까지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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