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종로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실물 최초로 대량으로 출토

기사입력 2021.07.06 11:02 조회수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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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동(옛 피막골) 땅속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 발굴

세종시대 천문시계 등 다양한 금속유물도 무더기 동반 출토

 

 

[서울문화인] 종로구 공평동(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옛 피막골)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과 함께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籌箭)을 비롯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같이 묻혀있는 형태로 발굴되어 조선 전기 조선 전기 금속활자 실물로 최초 출토됨과 더불어 과학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발굴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에 공개되는 금속활자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다. 일괄로 출토된 금속활자들은 15~16C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활자(최소 5종 정도 혼합)가 한 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한정되어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점,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가 모두 출토된 점 등은 이번이 최초의 사례이다.

 

경자자(庚子字, 1420년), 갑인자(1434년), 을해자(1455년),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 을유한글활자(1465년), 병자자(1516년), 경서자 한글활자(1580년) 계열 활자들로 추정

 

 

한글 금속활자(대자)-반전.jpg
공평구역 한글 금속활자(대자)-반전

 

 

한글 금속활자(중자).jpg
공평구역 한글 금속활자(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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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구역 한글 금속활자(소자)-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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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경(圓覺經), 1465년 / 원각경의 대문은 대자, 대문의 구결은 중자, 요해는 중자, 요해의 구결은 소자, 요해의 주석은 소자를 썼다. 결국 한글 구결은 중자·소자로, 한문은 대·중·소자가 쓰인 것으로 모두 5종의 금속활자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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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 한자음 표기사례 / 동국정운은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조선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운서(韻書), 중국의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된 ㅭ, ㆆ, ㅸ 등 기록되어있다.

 

 

 

이 외에도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문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하여 연결하는 어조사의 역할을 한 연주활자(連鑄活字, 한문 사이에 자주 쓰는 한글토씨(‘이며’,‘이고’ 등)를 인쇄 편의상 한 번에 주조한 활자)도 10여 점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을해자(1455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된 점은 유례없는 성과다. 또한, 현재 금속활자들의 종류가 다양하여 조선전기 인쇄본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여러 활자들의 실물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어 한글 창제의 실제 여파와 더불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시의 인쇄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연주활자.jpg
연주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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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자 추정

 

 

 

도기항아리에서는 금속활자와 함께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려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동제품은 동판(銅板)과 구슬방출기구로 구분된다. 동판에는 여러 개의 원형 구멍과 ‘일전(一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구슬방출기구는 원통형 동제품의 양쪽에 각각 걸쇠와 은행잎 형태의 갈고리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하여 자동물시계의 시보(時報)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되며,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 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 (조선 시대의 자동 물시계는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옥루가 있다.)

 

 

주전.jpg
주전

 

흠경각 옥루 복원품 사진(국립중앙과학관 윤용현 제공).jpg
흠경각 옥루 복원품 사진(국립중앙과학관 윤용현 제공)

 

 

 

활자가 담겼던 항아리 옆에서는 주․야간의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가 출토되었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되고 밤에는 해를 이용할 수 없는 단점을 보완해 별자리를 이용하여 시간을 가늠한 용도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7년(세종 19년) 세종은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종 때의 일성정시의는 중국 원(元)의 거대한 천문관측의기인 간의(簡儀) 구조를 혁신하여 창제한 새로운 형태의 천문시계의 일종이며, 세종 당시의 과학 기술을 보여주는 독창적으로 창제한 주야 겸용 천문시계이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일성정시의 중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 등 일성정시의의 주요 부품들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며, 주천도분의 눈금을 ¼도 까지 정밀하게 하여 365 ¼도를 사용한 정밀하고 세종대 규격과 거의 일치하여 세종 당시 제작한 4벌 중에 하나로 추정되는 귀중한 것이다. 현존하는 자료 없이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세종대의 과학기술의 그 실체를 확인한 것으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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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정시의

 

 

일성정시의 제작에 관한 내용은 『중보문헌비고』 상위고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 자신이 그 구조와 용법에 대하여 다루었는데, 김돈(金墩)의 명(銘)에 자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낮에는 정밀한 해시계로서 적도면에 위치한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의 눈금을 사용한다. 밤에는 당시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항성(恒星)이 규칙적으로 1시간에 15°씩 일주운동(日周運動)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북극성을 중심으로 천구상에서 회전하는 북극성 주위의 가깝고 밝은 제성(帝星 작은곰자리 베타성)의 위치를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의 눈금으로 밤 시간을 측정하였다.

 

 

일성정시의 구조도.jpg
일성정시의 구조도

 

 

 

문화재청은 “Needham은 일성정시의의 관 측방법이 서양에서 1520년 이후에 제작한 휴대용 밤 시계 기능과 유사하지만 더 정확했고 세차운동까지 조절하는 정교한 기기”로 평가했으며, “앞으로 세종 시대 일성정시의의 구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서 사라져버린 세종시대 천문의기 복원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분석 연구를 수행하여 세종시대 유물과 같은 규모의 온전한 일성정시의가 복원 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소형화기인 총통은 승자총통 1점, 소승자총통 7점으로 총 8점이다. 조사 결과, 최상부에서 확인되었고, 완형의 총통을 고의적으로 절단한 후 묻은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크기는 대략 50~60cm 크기이다. 특히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계미(癸未)년 승자총통(1583년)과 만력(萬曆) 무자(戊子)년 소승자총통(1588년)으로 추정되었다. 장인 희손(希孫), 말동(末叱同) 제작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장인 희손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차승자총통>의 명문에서도 확인되는 이름이다. 만력 무자년이 새겨진 승자총통들은 명량 해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당시 총통은 총구에 화약과 철환(총알)을 장전하고 손으로 불씨를 점화해 발사하였다.

 

 

승자총통 출토품 일괄.jpg
승자총통 출토품 일괄

 

 

 

동종은 일성정시의의 아랫부분에서 여러 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누어 출토되었다. 포탄을 엎어놓은 종형의 형태로,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龍鈕, 용 모양의 손잡이)도 있다, 귀꽃 무늬와 연꽃봉우리, 잔물결 장식 등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왕실발원 동종의 양식을 계승하였다. 종신의 상단에‘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라는 예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어 1535년(중종 30년) 4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실발원의 동종에는 주로 해서체가 사용되므로, 왕실발원의 동종과는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1469년 추정 <전 유점사 동종(국립춘천박물관 소장)>, 1491년 <해인사 동종(보물)> 등의 유물과도 비슷한 양식이다.

 

 

일성정시의 및 동종 출토 모습.jpg
일성정시의 및 동종 출토 모습

 

 

조사 지역은 현재의 종로2가 사거리의 북서쪽으로, 조선 한양도성의 중심부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한성부 중부(中部) 견평방(조선 전기 한성부 중부 8방의 하나로 궁궐 관련 시설과 상업시설 등이 복합적으로 있는 도성 내 경제문화중심지)에 속하며, 주변에 관청인 의금부(義禁府)와 전의감(典醫監, 조선 개국년인 1392년 설치된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관장하던 관청)을 비롯하여 왕실의 궁가인 순화궁(順和宮, 조선 중종의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 궁), 죽동궁(竹洞宮, 조선 순조의 명온공주를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 궁) 등이 위치, 남쪽으로는 상업시설인 시전행랑이 있었던 운종가(雲從街)가 위치했던 곳이다.

 

 

조사지역 일원 위성사진.jpg
조사지역 일원 위성사진

 

 

조사 결과,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총 6개의 문화층(2~7층)이 확인되었다. 금속활자 등이 출토된 층위는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인 6층(16세기 중심)에 해당되며, 각종 건물지 유구를 비롯하여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도 같이 확인되었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들은 금속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잘게 잘라 파편으로 만들어 도기항아리 안과 옆에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활자들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일부 확인되었다. 이들의 사용, 폐기 시점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에 제작된 소승자총이 있어 1588년 이후에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항아리 내부 금속활자 출토 모습.jpg
항아리 내부 금속활자 출토 모습

 

 

한편, 이번 발굴조사는 (재)수도문물연구원(원장 오경택)이 진행하고 있으며, 출토 유물들은 현재 1차 정리만 마친 상태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여 안전하게 보관 중에 있으며, 앞으로 보존처리와 분석과정을 거쳐 각 분야별 연구가 진행되면, 조선 시대 전기, 더 나아가 세종 연간의 과학기술에 대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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