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향원정, 건립 초기 때의 모습으로 복원

취향교, 향원정 남쪽 제자리에 아치형 목교로 원형 복원
기사입력 2021.11.05 18:16 조회수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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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 단풍 02.jpg
복원된 경복궁 향원지(香遠池)의 향원정(香遠亭)과 취향교(醉香橋)

 


 

 

 

[서울문화인] 왕과 왕비의 휴식처인 경복궁 향원지(香遠池)의 향원정(香遠亭)과 취향교(醉香橋) 복원을 3년 만에 완료했다. 이번 복원공사는 향원정 전체 해체보수, 취향교 제자리 복원, 이완된 기단 해체 후 재설치 등에 대한 복원이 진행되었으며, 313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경복궁 향원정_가을-1.jpg

복원전 경복궁 향원정

 


경복궁 향원정(보물 제1761)은 경복궁 후원 영역에 네모난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조성된 상징적인 2층 정자 건물로, 2층의 익공식(翼工式,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곳에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가 새날개처럼 뾰족하게 처리된 것) 육각형 정자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다르게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정확한 창건연대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1887(고종 24)승정원일기향원정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면서 건립 시점을 1887년 이전으로 추정해 왔다. 하지만, 이번 복원공사에서 실시한 목재 연륜연대조사를 통해 1881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채된 목재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어 건립 시기를 추정하는 근거가 마련되면서 향원정 건립 시기는 1885년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경복궁03.jpg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경복궁과 육조거리 모형

 

 

조선시대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은 1395년 창건됐고,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됐다.(고종 2(1865), 경복궁 중건 시작, 고종 4(1867), 경복궁 중건 완료, 고종 10(1873), 건청궁을 새로 건립, 고종 13(1876), 화재로 830여 칸 소실, 고종 25(1888),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 다시 건립)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강녕전, 교태전 등 많은 건물이 훼철돼 옛 모습을 잃었다. 경북궁 복원은 광화문 복원(1968)을 시작으로 영추문 복원, 동정문 건립(1975), 강녕전, 교태전 일곽 복원(1994), 흠경각 복원(1995)을 이어 오다가 1995,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물 철거 하면서 시작한 중, 장기 복원 작업을 발표하면서 동궁(자선당, 비현각) 복원(1995), 흥례문, 유화문, 영제교 복원(2001), 근정정 보수(2001), 경회루 동편담장, 태원전 복원(2005), 건청궁 일곽 복원(2006), 함화당, 집경당 보수 및 주변 행각 복원(2008), 광화문 재복원(2010) 36동에 불과하던 경복궁 건물은 146동으로 늘었다. 고종 때의 중건 당시 경복궁 모습으로 되돌리는 복원은 2045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향원정은 해방 이후 몇 차례 보수를 거쳤지만 계속해서 기울어짐과 뒤틀림 현상이 발생되어 해체보수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11월부터 해체보수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번 복원에서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취향교이다. 취향교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향원정의 북쪽에 세워진 다리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나서는 1953년 관람 편의를 위하여 본래 위치(향원정 북쪽)가 아닌 향원정 남쪽에 세워졌다가 이번에 원래의 자리를 찾아 복원되었다. 또한, 이전에는 석교 교각에, 목재 난간을 갖춘 평교형태였다가 이번에 아치형 목교로 제 모습을 찾았다.

 

 

 

취향교.jpg
취향교

 

 

취향교 위치.jpg
취향교 위치

 

 

취향교 조사지역 전체 전경(향원정 보이는 모습) 01.jpg
취향교의 교각의 기초, 적심과 나무 기둥

 

 

 

그런데 처음 멀리서 봤을 때 왠 철재 다리로 복원을 하였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치 철로 만든 것 같은 질감의 하얀색 아치형 목교는 주변과 너무 어울리지 않은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고증에 따른 것이었다. 1901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촬영한 사진, 1903년 미국 장교 그레이브스가 촬영한 사진에 모두 이 하얀색 아치형 다리가 보인다. 이번 복원은 이 옛 사진에 대한 3D모델링을 거쳐 크기와 모양을 복원한 것이었다.

 

 

향원정 복원 고증 사진_관문각에서 본 향원정(Arnold 편지).jpg
향원정 복원 고증 사진_관문각에서 본 향원정(Arnold 편지)

 

향원정 복원 고증 사진_한러수교 20주년 기념도록(1891~1901).jpg
향원정 복원 고증 사진_한러수교 20주년 기념도록(1891~1901)

 

복원에 사용된 사진의 3D모델링 작업 01.jpg
복원에 사용된 사진의 3D모델링 작업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는 서양 문물이 급격하게 들어오던 시기라 서양 문물의 도입에 큰 거부감이 없었던 고종이 전통 양식과 서양 양식을 결합해 지은 것이 아닌가라는 평가를 했다. 이는 향원정 건립 이후, 1885년과 1901년 사이 취향교에 대한 중수 기록이 없어 현재로는 사진에 남아 있는 모습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번 복원작업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구들의 구체적인 형태와 연도(煙道, 연기가 나가는 통로)의 위치도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유구를 그대로 활용하여 향원지 호안석축(護岸石築, 강이나 바닥기슭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돌로 만든 벽) 외부와 연결된 낮은 형태의 굴뚝을 복원하였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 특이하게 굴뚝이 아궁이보다 낮은 형태로 나타났는데 배연실험으로 아궁이에서 연도를 통해 연기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것도 확인하면서 그대로 복원하였다.

 

 

향원정 온돌구조.jpg
향원정 온돌구조

 

 


더불어, 향원정의 6개 기둥 중 동남방향 초석(楚石, 주춧돌)에 대한 조사를 통해 건물 기울어짐의 주요원인이 초석을 받치는 초반석의 균열로 인한 초석 침하현상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에 복원과정에서 전통방식의 말뚝기초 시공을 통해 지반을 보강하였으며, 향원지 영역의 옛 사진을 분석하여 변형·훼손된 절병통(모임지붕 상부 꼭지점에 올리는 항아리 모양의 장식기와), 창호, 능화지, 외부 난간대 등을 복원했다. 또한, 과학적 실험을 통해 향원정의 원형 단청도 확인하였지만 그대로 두는 것으로 복원을 마무리 하였다. 하지만 향후 단청안료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시행할 예정이라 밝혔다.

 

 

2층 내부.jpg
2층 내부

 

 

2층 단청 02.jpg
2층 단청 / 흘러내린 단청이 모이는 것은 최초 단청 작업을 한 이후, 목재를 덧대었는데 그 상태로 이후에 다시 단청을 하여 목재 사이로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1층 내부.jpg
1층 내부

 

 

능화지를 제작 중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 이수자 강성찬.jpg
능화지를 제작 중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 이수자 강성찬 / 능화지(綾花紙)는 요철무늬의 능화판에 밀랍을 바르고 그 위에 한지로 된 배접지를 올린 후 밀돌로 밀어 문양을 시문하여 제작한 종이이다.

 

  

 

복원된 향원정.jpg
기존 부재 최대한 재사용하여 복원 / 목재 재사용률은 82%, 석재 재사용률은 85%이며, 기와 재사용률은 11%(전통수제기와 시공, 암키와 2300여 매, 수키와 1200여 매 전통수제방식으로 제작)이다.

 


 

 

이번에 취향교 복원과 향원정 보수가 진행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은 아니다. 건청궁 앞은 1887,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사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과 중국보다도 2년 정도 빠른 동양 최초이기도 하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지 7년 만이다.

 

전기가 처음 들어오게 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이 조선으로 돌아와서 고종에게 이를 소개하였다. 고종은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밝게 해주는 전구에 탄복하였고, 고종이 직접 에디슨에게 친서를 보내면서 처음 전기를 도입하게 되었다. 당시 발전기의 냉각수는 향원정 연못의 물을 갖다 썼으며, 향원정 주변에도 가로등이 설치됐다고 한다. (건청궁 앞에는 한국의 전기 발상지라고 새긴 표지석을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러한 역사적 바탕으로 향원정 부근에 설치되었던 전기등도 복원할 계획이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복원된 향원정 내부는 가까운 시일 내에 국민에게도 공개될 예정이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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