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공주 왕릉원 무덤, 중국 남조 출신의 기술자가 만들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29호분 폐쇄 벽돌에서 제작자 출신지가 기록된 명문 확인
기사입력 2022.01.27 15:17 조회수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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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_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출처 백제세계유산센터).jpg
추가_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출처 백제세계유산센터)

 

 

[서울문화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임승경)가 지난해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29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면서 왕릉급 고분을 재확인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무덤 입구를 폐쇄하는데 사용한 벽돌을 전량 수습하여 정리한 결과,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 도읍기(475~538, 지금의 공주)에 조성된 7기의 고분으로, 지난 19631월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1년 무령왕릉의 지석이 발견되면서 고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확인된 왕릉이다.

 

 

무령왕릉.jpg
무령왕릉

 

 

이곳의 무덤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과 벽돌무덤(塼築墳)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이 중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 벽돌이 이미 출토된 바 있어 당시 대외교류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비교 평가되고 있다. 이번 29호분 벽돌에서 확인된 명문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것으로서 당시 제작자의 출신지가 기록된 매우 중요한 자료다.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橫穴式 石室墳)은 판 모양의 돌을 이용하여 널()을 넣는 방을 만들고, 방의 한쪽에는 외부에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에 흙을 덮어씌운 무덤이며, *벽돌무덤(전축분, 塼築墳)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이다.

 

 

29호분 벽돌 명문(刻書)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 01.jpg
29호분 벽돌 명문(刻書)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

 

 

29호분 벽돌 01.jpg
29호분 벽돌

 

 

새롭게 확인된 명문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이것을 만든 사람은 건업인이다로 해석할 수 있는데 건업(建業)’은 중국 남경의 옛 이름으로 이것을 제작한 사람이 중국 남조의 남경 출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작자가 외부인임을 증명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 당시 벽돌과 무덤의 축조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6호분 명문의 경우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또는 양선이위사의(梁宣以爲師矣)’으로 판독되었는데 이 명문에서 표기된 ()’은 중국 양나라(502~557)를 가리킨다. 이번 29호분 명문을 통해 제작자의 출신지가 남조의 도성인 건업(建業)’으로 확인되면서 두 고분의 명문을 통해 벽돌무덤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제작에서도 중국 남조의 기술자들이 직접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9호분은 19336호분에 이르는 통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루베 지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파견된 아리마쓰 교이치 등이 조사하여 굴식돌방무덤으로 밝혀졌으며, 네 벽에는 철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사신도가 확인되기도 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의 축조 순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6호분이 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산리 제6호 전축분 서벽 백호.jpg
송산리 제6호 전축분 서벽 백호

 

 

이 외에도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중국의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 소장)를 통해서도 백제가 중국 양나라와 교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양직공도에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는데 백제국사(百濟國使)에 관한 부분은 사신도와 7160여 자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신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을 쓰는 좌임(左衽)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이곳에 나타나는 백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대표하는 나라임을 강조하여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국가에 대한 영토확장 내지 영향력 확대의 야심을 드러내고 우월의식 특히 신라와의 대항의식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직공도 03-1.jpg
양직공도 사본, 중앙 백제사신

 

 

실제 당시 무령왕(백제 25대 임금, 462-523, 재외 501-523)은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 및 가야 접경지역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였고, 더욱 확대해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당시 무령왕은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다시금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 갱위강국更爲强國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 도읍기(475~538, 지금의 공주)에 조성된 7기의 고분으로, 지난 19631월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1년 무령왕릉의 지석이 발견되면서 고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확인된 왕릉이다. 29호분은 19336호분에 이르는 통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루베 지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파견된 아리마쓰 교이치 등이 조사하여 굴식돌방무덤으로 밝혀졌으며, 네 벽에는 철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사신도가 확인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번 확인된 명문은 고대사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백제 웅진기의 대외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명문에 대한 3차원 입체(3D) 정밀 분석 등을 시행하여 글자를 보다 명확히 판독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토대로 백제시대 서체 복원 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라 밝혔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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