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 알려진 바 없는 구형(球形)의 휴대용 해시계 ‘일영원구’ 국내환수

기사입력 2022.08.22 14:20 조회수 691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청장 01.jpg
일영원구을 살펴보고 있는 최응천 문화재청장

 

 

 

[서울문화인]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바 없는 구형(球形)의 휴대용 해시계 일영원구(日影圓球)’ 1점이 지난 3월 미국 경매를 통해 매입되어 국내에 들어와 지난 18일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번에 환수된 일영원구는 휴대용 구형해시계로서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볼 수 없던 독창적인 희귀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한국시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반구(半球)의 형태로 태양의 그림자를 통해 시계를 확인하는 영침(影針, 해그림자를 만들기 위한 뾰족한 막대)이 고정되어 있어 오로지 한 지역에서만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달리, ‘일영원구는 둥근 공 모양인 원구(圓球)의 형태로 두 개의 반구가 맞물려 각종 장치를 조정하면서, 남반구에서도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먼 바다로 나가 항해 할 경우에도 시간을 측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는 받침 부분 은상감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일영원구.jpg
일영원구(日影圓球)

 

 

일영원구의 한쪽 반구에는 12(十二支)의 명문과 96칸의 세로선으로 시각이 표시되었는데, 이는 하루를 1296(, 15)으로 표기한 조선 후기의 시각법을 따른 것이다. 또한 정오(正午) 표시 아래에는 둥근 구멍(시보창, 時報窓)이 있어,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쪽의 반구를 움직이면, 이 창에 12지의 시간 표시(시패, 時牌)가 나타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시보창에 표시되는 시패는 총 9개로, 12지 중 해((()은 표시되어있지 않다. 이는 해시계는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만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해가 뜨지 않는 시간인 해시(2123), 자시(2301), 축시(0103)는 표시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국보로 지정된 자격루와 혼천시계에서도 12지로 시간을 나타내는 시보(時報) 장치를 둔 사실로 미루어보아 조선의 과학기술을 계승하는 한편, 외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던 상황 속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이 고안된 유물로 추정했다.

   

 

이용삼 충북대교수 01.jpg
이용삼 충북대교수

 

 

이용삼 충북대학교 교수의 검토에 따르면 일영원구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림줄로 수평을 맞추고, 나침반으로 방위를 측정하여 회전축이 지구의 자전축인 하늘의 북극 방향과 일치하도록 설치 한 후, 위도조절장치를 통해 위도를 조정, 횡량에 비추는 태양의 그림자가 홈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현재의 시간을 알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CT 조사.jpg
일영원구 CT

 

 

그러나 국립고궁박물관이 CT 촬영을 통해 수평이나 수직을 헤아려보기 위해 추를 달아 늘어뜨리는 다림줄은 흔적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유실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

 

또한, ‘일영원구는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과학유물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한쪽의 반구에는 대조선 개국 499(1890: 고종 27) 경인년 7월 상순에 새로 제작하였다(大朝鮮開國四百九十九年庚寅七月上澣新製)’는 명문과 함께, ‘상직현 인(尙稷鉉印)’이 새겨져 있어, 18907월 상직현이라는 인물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단 반구의 명문(‘大朝鮮開國四百九十九年庚寅七月上澣新製’ 및 ‘尙稷鉉印’).jpg
하단 반구의 명문(‘大朝鮮開國四百九十九年庚寅七月上澣新製’ 및 ‘尙稷鉉印’)

 

 

 

고종실록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상직현(尙稷鉉, 생몰년 미상)은 고종대 활동한 무관으로 주로 총어영(摠禦營, 고종대 설치된 군영(軍營)의 하나로 국왕 호위와 궁궐 및 도성 방어를 담당함) 별장(別將, 조선시대에 각 영(()에 소속되어 있던 군관)과 별군직(別軍職, 조선시대 후기 국왕의 신변 보호를 담당한 관직) 등에 임명되어 국왕의 호위와 궁궐 및 도성의 방어를 담당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료를 통해 상직현은 1881년에 직접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 근대 문물을 접한 무관이었다는 점과 아들 상운은 근대적 고등 전기기술을 습득한 엔지니어였다는 점(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되어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화기를 들여온 인물) 등을 통해 이 기구를 만들 수 있었던 인물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유물이 제작된 시기인 조선후기의 주조 기법과 은입사 기법 등의 장식 요소가 더해진 점도 주목된다. 네 개의 꽃잎 형태로 제작된 받침에는 용, 항해 중인 선박 그리고 일월(日月)’이 상감되어 있어, 향후 금속공예 등 다양한 방면의 연구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영원구 받침 은입사 01.jpg

 

일영원구 받침 은입사 02.jpg

 

 

한편, ‘일영원구의 국외 반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초 소장자이던 일본 주둔 미군장교의 사망 이후 유족으로부터 유물을 입수한 개인 소장가가 경매에 내었는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사무총장 김계식)이 작년 말 해당 유물의 경매 출품 정보를 입수한 이후 면밀한 조사와 문헌 검토 등을 거쳐 경매를 통해 낙찰 받아 국내로 들여오게 되었다.

 

일영원구는 오는 819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2022. 7. 7.9. 25.) 특별 전시를 통해, 앞서 지난 달 환수되어 공개된 조선 왕실 유물 보록과 함께 국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저작권자ⓒ서울문화인 & www.sculturein.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