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인] ‘변강쇠’와 ‘옹녀’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19금’, ‘성인물’이라는 단어가 연상이 되는 것은 아마 오래전 영화의 이미지 때문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국립창극단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19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2014년 초연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오르며 국립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잃어버린 판소리 일곱 바탕 중 하나인 ‘변강쇠타령’을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재해석한 작품. 고전을 유쾌하고 기발하게 재해석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고선웅이 극본을 쓰고 연출했다.
그는 외설로 치부되던 ‘변강쇠타령’을 오늘날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격조 높은 사랑 이야기로 풀어낸 가운데, 판소리 원전의 줄거리는 따라가되, 옹녀와 변강쇠의 캐릭터를 다시 구축하고 이야기를 새롭게 창작하였다. 또한 남녀의 성기를 묘사하는 ‘기물가(己物歌)’ 등 원전의 해학을 살리고, 템포감 있는 구성과 재기발랄한 말맛을 더해 관객의 웃음보를 쥐락펴락한다.
또한 변강쇠가 아닌 옹녀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인기 비결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변강쇠에게만 맞춰져 있던 시선에 ‘점’을 찍고 옹녀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창극 속 옹녀는 팔자가 드센 여자라는 굴레를 물리치고, 힘든 운명을 개척하며 사랑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당차게 살아가는 여인이다. 옹녀가 가진 적극성․생활력․생명력은 현대인들이 공감할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고선웅 연출의 톡톡 튀는 대본과 연출과 더불어 국악그룹 푸리 멤버이자 ‘바라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한승석은 원전의 소리를 살리면서도, 민요·대중가요 등 한국인의 흥을 자극하는 다양한 음악을 극과 딱 맞아떨어지게 배치해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뮤지컬 무대와는 또 다른 한국적 흥겨움을 확실히 선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처럼 판소리 원작의 약점을 보완한 생명력 가득한 이야기, 극과 어우러지는 흥겨운 음악으로 요즘 젊은 세대가 외면하는 우리의 고전을 남녀노소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초연의 호평에 힘입어 창극 최초로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극본 부문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 인정받았다. 이후 서울·여수·울산·안동 등 국내 11개 도시를 비롯해 2016년에는 유럽 현대공연의 중심이라 평가받는 프랑스 파리의 테아트르 드 라 빌에 창극 최초로 공식 초청되어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창극’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깨며 총 88회 공연을 통해 41,365명의 관객과 만나면서 ‘외설적’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명실상부한 ‘창극계 스테디셀러’ 작품으로 거듭났다.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유수정)이 2019-2020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개막작으로, 오는 8월 30일(금)부터 9월 8일(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 무대에 올려지는 이번 공연은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주역 등용이다.
초연부터 5년간 호흡을 맞춰온 옹녀 역 이소연과 변강쇠 역 최호성 외에, 유태평양이 새로운 변강쇠로 등판한다. 유태평양은 2016년 국립창극단 입단 후 ‘오르페오전’ ‘심청가’ 등에서 주역을 맡으며 타고난 끼와 실력을 인정받았다. 창극 ‘흥보씨’의 제비, 국립극장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의 흥부 등 코믹 연기도 재기발랄하게 소화해낸 만큼, 정력남 변강쇠는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를 모은다. 옹녀 역의 언더스터디로 캐스팅된 20대 소리꾼 김주리도 11세에 9시간 20분간 판소리를 연창하며 최연소·최장 시간 노래 기네스 기록을 세운 소리꾼으로,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을 예정이다. 이외에도 초연 때부터 매해 농익은 연기와 차진 소리를 선보여온 국립창극단원들은 밀도감 있는 무대도 기대케 한다.
또한 이번 공연에서는 음악의 디테일을 다듬고 조명․영상․소품․의상 등 미장센을 수정해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초연 후 5년 만에 처음으로 먹색 무대를 초록색으로 바꿔, 명랑하고 밝은 모습으로 변신을 예고했다.
남자들의 잇따른 죽음의 원인을 옹녀 때문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 때문에 옹녀는 마을에서 쫓겨나 우연히 황해도 청석골에서 변강쇠를 만나 신방을 차린다. 어느 날 땔감을 구하러 갔던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오는 바람에, 장승의 신들에게 병을 얻은 변강쇠가 결국 죽게 된다는 판소리 원전의 줄거리는 이 작품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창극은 원전의 결말을 완전히 뒤엎는다. 변강쇠의 죽음 이후, 옹녀의 뚜렷한 주관에 의한 선택과 이어지는 결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판소리에서는 초상살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는 옹녀가 홀로 떠나며 수동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만, 창극에서 옹녀는 주어진 역경에 굴하지 않고 종국에는 사랑의 결실인 생명을 잉태해 돌보는 어머니로서 희망을 구현한다. [이선실 기자]
[관람료 : R석 50,000원, S석 35,000원, A석 20,000원 / 만 18세 미만 관람 불가 / 135분(중간휴식 15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