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화첩의 전모, 반환된 지 8년 만에 일반 공개

<겸재정선화첩> 출판 및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회 개최
기사입력 2013.11.26 21:21 조회수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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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조선후기 최고의 진경산수화가로 손꼽히는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21점을 모은 <겸재정선화첩>의 전모가 독일에서 영구대여 형식으로 반환된 지 8년 만에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의 회화실(지하 1층)’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을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겸재정선화첩>은 독일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총아빠스(대원장)가 1925년 한국 방문 중에 수집하여 독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화첩은 2005년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80년 동안 소장했다. <겸재정선화첩>은 1975년에 당시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이듬해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국내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화첩을 반환받기 위한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노력으로 2005년 10월 22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겸재정선화첩>을 한국의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의 형식으로 반환했다. 현재 화첩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이다.



 


<겸재정선화첩>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창출한 겸재 정선이 비단에 그린 총 21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경산수화, 고사인물화, 산수인물화 등 다양한 화제(畵題)를 다룬 이 화첩은 정선의 다채로운 예술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21점의 작품 중에서 금강산의 전체 경관을 담은 〈금강내산전도〉와 내금강의 명소인 〈만폭동도〉, 외금강의 명소인 〈구룡폭도〉 등 금강산 그림 3폭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정선은 내금강의 전체 경관을 담은 <금강내산도>를 9점이나 남길 만큼 금강산을 즐겨 그렸는데, 이 화첩의 <금강내산전도>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747년 작품인 <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도>와 상당히 흡사하여, 정선의 말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태조 이성계가 성장기를 보낸 함흥의 고향집에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 소나무를 그린 〈함흥본궁송도〉와 대동강변의 연광정을 중심으로 평양성을 재현한 <연광정도>는 정선이 직접 가보지 않고 그려 실제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함흥본궁송도〉는 1756년 함흥에 다녀온 조선후기 문신인 박사해(1711∼1778)가 자신의 문집인 ‘창암집’에서 “본궁을 방문한 적이 없는 정선에게 본궁송을 그려달라고 청했더니 자신의 설명만 듣고도 실제로 본 듯이 묘사해냈다”고 전하고 있다.



 


단행본 표지


 


이번 전시와 아울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최근 ‘돌아온 문화재 총서 시리즈’ 1로 <겸재정선화첩>의 형태와 모양을 최대한 재현한 영인복제본과 화첩의 환수과정 및 학술적 의의를 밝히는 글들을 모은 단행본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등 도서 2권을 출간하였으며 단행본은 시중에서 구입 가능하다. 한편, 재단은 매년 ‘돌아온 문화재 총서 시리즈’를 발간하여 돌아온 문화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가치를 국민들과 공유하는 작업을 추진해나갈 예정이라 밝혔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시회는 11월 26일부터 2014년 2월 2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며, 매주 화요일 화첩 그림이 한 면씩 교체 전시된다.


 


 


금강내산전도


비단에 엷은 색, 33×54.3㎝
내금강의 전경을 재현한 그림이다. 화면은 흙과 나무가 많은 토산과 바위로 이루어진 암산으로 이분되는데, 토산 부분이 ‘ㄴ’자 형태를 이루며 화면 왼쪽과 하단을 감싸고 있다. 삼림이 울창한 토산은 어두운 녹색으로 표현하되 전각이 밀집되어 있는 사찰 주변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를 더해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암산의 화강암 봉우리는 힘차게 그은 먹 선으로 형태를 잡고 하단부에 녹색을, 상부에 하얀색 호분을 칠해 형상화했다. 사찰과 암자의 건물에는 홍색을 써서 화면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폭동도


비단에 엷은 색, 29.4×23.4㎝


내금강의 명소 만폭동 일대의 경관을 담은 진경산수화이다. 화면 중앙의 바위 절벽, 즉 금강대 아래 펼쳐진 너럭바위 양쪽의 계류가 모여 소(沼)를 이룬다. 금강대 뒤편으로 대소 향로봉이 위치하고, 오른쪽 법기봉 중턱에 구리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보덕굴이 보인다. 그 사이의 뾰족한 암봉들은 중향성의 일부이다.


 


구룡폭도


비단에 엷은 색, 29.6×23.4㎝  
외금강의 명소 구룡폭포와 구룡연 일대의 모습을 담은 진경산수화이다. 중앙에 좌우로 가파르게 솟은 암벽을 타고 내리꽂히는 물줄기가 보인다. 떨어진 폭포수는 둥글게 파인 구룡연에 모였다가 다시 계류를 형성하며 흘러내린다. 정선은 자신이 현장에서 본 개별 요소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고자 폭포와 암벽에 수평시점을, 구룡연에는 부감을 적용해 재조합하였다. 대상 경관의 특색을 부각시키는 구도와 종횡으로 엇갈리는 분방한 필치, 송림 표현 등에서 정선의 개성적 화풍과 노련미를 읽을 수 있다.


 


함흥본궁송도


비단에 엷은 색, 28.9×23.3㎝


정선이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가 성장기를 보낸 함흥의 고향집에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 소나무 세 그루를 그린 작품이다. 소나무는 원래 여섯 그루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말라 죽었다고 한다. 화면은 담장 너머에 비스듬히 솟은 거대한 소나무 세 그루와 배경을 이루는 본궁 내 건물 지붕으로 채워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정선이 실제로 함흥을 방문하지 않고 이 작품을 그렸다는 것이다.『창암집蒼岩集』권9에 실린 「함흥본궁송도기」의 내용에 따르면, 1756년 함흥에 다녀온 박사해(1711∼1778)가 그때까지 본궁을 방문한 적이 없는 정선에게 본궁송을 그려달라고 청했더니 자신의 설명만 듣고도 실제로 본 듯이 묘사해 냈다고 한다.


 


연광정도


비단에 엷은 색, 28.7×23.9㎝ 
대동강변의 연광정을 중심으로 평양성의 경관을 재현한 작품이다. 상부 여백에  “해동 제일의 승경, 제일의 필력(海東第一勝 第一筆)”이라는 감상평이 있다. 연광정은 1528년 평안감사 허굉(1471∼1529)이 덕암 위에 건립하였고, 그 이후 평양뿐 아니라 평안도를 대표하는 명승으로 각종 시문의 제재가 되는 한편 명승도의 화제로도 각광받았다. 정선은 연광정과 대동문의 규모를 과장시켜 초점을 살리고, 평양성 내외의 지형지세가 드러나도록 하였다. 높은 석주가 떠받치고 있는 연광정의 구조는 실제 모습과 다른데, 이는 정선이 평양에 가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그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산방학도


비단에 엷은 색, 29.1×23.4㎝


눈 덮인 산 속에서 분홍빛 옷을 입은 선비가 흰 꽃이 피어난 매화나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있다. 하늘에서는 멀리 학 한 마리가 날아온다. 이것은 임포(林逋)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중국의 오월이라는 나라의 백성이었던 임포는 북송에 의해 오월이 망하자 절개를 지키면서 항주의 고산에 은거하며 지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키우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정선은 거칠게 표현한 바위를 앞 쪽에 배치하고 흰 눈이 잔뜩 덮인 먼 산을 배경으로 한 후, 인물과 매화를 화사하게 표현하여 그림의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횡거관초도


비단에 엷은 색, 29.0×23.4㎝


푸른 잎이 무성한 파초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사이에 수염이 기다란 선비가 땅바닥에 앉아 있다. 사방으로 벌어진 넓은 파초잎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선비는 빈 족자를 펼쳐 놓고 그 옆에 붓 한 자루와 붉은 벼루, 초록색 연적을 가지런히 놓은 채 먼 하늘을 쳐다보며 시상을 가다듬고 있다. 왼편으로는 구멍이 숭숭 뚫린 커다란 괴석이 서 있어 잘 꾸며진 정원 안의 장면인 것을 알려준다.  그림 속의 선비는 북송대 학자인 장재(張載)이며, 횡거는 그의 호이다. 위쪽 배경을 생략하여 파초와 주인공을 돋보이도록 했으며, 산뜻한 색깔을 사용하여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파초의 잎맥까지 정교하게 그렸으며, 인물 묘사도 상세하여 얼굴에서는 인자하고 덕망있는 학자의 풍모가 잘 드러난다.


 


노재상한취


비단에 엷은 색, 32.0×21.8㎝


지그재그로 꺾인 흰색 돌난간이 그림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를 경계로 아래쪽에는 네모반듯하게 구분된 약초밭이 있다. 자세히 보면 구역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약초가 자라고 있다. 분홍색 도포를 걸친 선비는 두 팔을 난간에 걸치고 모서리 장식에 턱을 괜 채로 엎드려 있다. 약초들이 푸릇푸릇 잘 자란 탓인지 흐뭇한 얼굴로 약초밭을 바라보는 중이다. 연두색 약초와 흰 돌난간, 회색 괴석과 푸른 나무에 둘러싸인 분홍빛 옷의 인물이 돋보인다.  그림 속의 선비는 송나라 때 재상이었던 사마광(司馬光)이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독락원(獨樂園)이라는 정원을 지어 한가로이 지냈는데, 한 쪽을 바둑판처럼 구획하고 각종 약초를 심었다고 한다.


 


 


 


[서울문화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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