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우 신부의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깊은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명상 에세이
기사입력 2009.07.14 17:32 조회수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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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제인 이찬우 요셉 신부가 쓴 모친에 대한 사모곡인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이지출판)은 모친의 사랑이 자식에 대한 외눈박이 사랑이었고, 이 신부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외눈박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슴깊이 느끼게 한다.



인천 주안3동 성당의 이찬우 주임신부는 모친의 자식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두고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십자가도 받아들이며, 오히려 그런 희생을 기쁨으로 여긴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은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식의 십자가를 안고 가면서도 자식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 어머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 때 자신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라고 어머니를 회상한다.



이 신부는 외조부모가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기도를 배웠고, 무릎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가슴에서 신앙을 얻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어머니는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기도가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버팀목이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의 숨결이 되었고,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으며, 존경하는 스승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신부의 부친과 모친은 1932년 가을, 김포 누산리 공소에서 본당 신부님을 모시고 혼인성가가 이루어졌다. 당시 누산리에는 다른 곳처럼 성당이 없고 공소였기 때문에 행주 본당 주임 신부님이 오셔서 혼인성사를 집전하셨다.



부자 집에 데릴사위로 오신 부친이 열일곱 모친과의 사이에 이내 딸을 낳았고, 집안은 평안하게 성장을 거듭했다. 열일곱에 큰 딸은 낳은 모친은 그저 친정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어린 처녀 같은 기분으로 살았지만, 어느 날 이웃에 새롭게 시집온 새댁이 동생을 안고 외출을 나온 착한 언니 같다는 말에 놀라 모성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래, 나는 이제 애가 아니다. 나는 호우를 언니 입장에서 돌본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서 돌보고 있는 것이다. 호우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나다.”라며 자의식을 일깨운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극진한 보호 아래 그저 소꿉장난 하듯 딸을 업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어머니와 첫 아이와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 것이다.



“누구나 아이를 낳았다고 바로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성애를 가지고 책임감을 느끼면서 비로소 엄마의 자격을 갖게 된다. 어머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기에 그때는 성숙한 모성을 가질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우누님을 시작으로 나까지 여섯 남매를 낳아 키우면서 그 고단한 삶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오는 동안 어머니는 더욱더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장인장모가 돌아가신 이후 부친은 당신이 평소 원하던 소장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소장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바깥출입이 잦아졌고, 출장이 길어지면서 아버지는 자연히 가족과 어울리기보다는 풍류를 접하게 되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버지는 평소에 체구도 출중하고 구성진 소리를 뽑아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으셨기에 밖에서 인기가 높았다. 말하자면 그 시기야말로 아버지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새로운 삶에 눈을 뜨신 것이다.”



이렇게 바깥으로만 도시던 부친으로 인하여 모친은 농사일에 아이들 육아로 평생을 쉴 틈 없이 보내야 했다. 산에서 나물을 뜯어 반찬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는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때론 부친의 도박 빚에, 외도에 바람 잘날 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특했던 이 신부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의 권유로 신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모친의 너무 기뻐하며 아들이 신부가 되는 일을 적극 추천하였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내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신부가 되기 위해 소신학교에 간 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10리길을 걸어 통진 본당에서 새벽기도를 드렸다. 나중에 어머님에게 여쭈니 “신부가 되려는 아들은 매일 새벽 6시에 미사를 봉헌하는데 어미인 내가 편히 누워 잠을 잘 수가 있겠느냐?” 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 신부가 사제가 된 이후, 인천가톨릭대학의 교수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많은 학생들은 이 신부의 어머니를 ‘나물 할머니’로 불렀다. 부친이 소장수를 시작한 이래 나물을 뜯어 반찬장사를 오랜 한 모친이 철철이 산에서 채취한 나물을 자식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해 반찬으로 만들어 보냈으니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에는 이 신부의 모친이 당연히 나물 할머니로 보였던 것이다.



이 신부의 모친은 늘 나물 할머니로 통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물을 캐왔고, 이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어 자식과 자식에게 배우는 학생들에 보냈던 것이다. 또한 성당의 건축헌금을 위해서도 수시로 나물로 반찬을 만들어 팔아 목돈을 마련하고 그 돈을 모아 헌금했다.



나중에 철이든(?) 부친도 동참하여 자식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였다. 못난 아들이 로마로 유학을 가서 고생을 할까봐.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수녀들을 위해서도 늘 기도하고 당신의 딸처럼 대해주셨고, 이웃의 불쌍한 이웃과도 늘 함께했다.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을 통하여 이찬우 신부는 “그 동안 많은 논문과 글을 쓰고 10여 권의 전문서적도 출간한 적이 있지만, 이처럼 감성적인 글을 쓴 것은 처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를 낳아서 키워 주시고 교육시켜 신학교에 보내어 사제가 되기까지, 그리고 사제로 32년간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나는 하루로 어머니를 잊어 본 일이 없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그리고 사제로 살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신 어머니, 사제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어머니를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와 함께 한 나의 삶은 한 인간으로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사제로서 행복했고 기뻤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여인으로 존경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은 저자가 어머님에 대한 40여년의 기록을 하나 둘 풀어쓴 사모곡이자 명상 에세이다. 사제의 눈으로 바라본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의 삶이 결국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해야 하는가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이찬우 요셉 신부는 1948년 김포 출생으로 가톨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우르바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천 화수동, 송도 성당 주임신부를 거쳐 가톨릭신학대학 교수, 인천 가톨릭대학 교수와 총장을 지냈다. 현재는 인천 주안3동 성당에서 주임신부로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김수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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