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국보 징비록과 류성룡을 살펴보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공동기획전 <징비록>개최
기사입력 2015.08.14 11:40 조회수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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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겪고 이렇게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으로 "내 지난 일의 잘못을 경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기 위해서다" 밝혔다. 이 징비록은 후대에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출판되어 동아시아 삼국에서도 읽혀지던 책이였다.


 


최근 드라마로 잘 알려졌으나, 좀처럼 잘 볼 수 없었던 국보 제132호 <징비록>초본을 비롯하여 류성룡이 <징비록>초본을 작성할 때 사용했던 경상과 함께, 류성룡과 사이가 각별했던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43)  종가 소장의 한글본 <징비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5호)이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징비록>특별전을 통해 공개하였다.


 



징비록원본


징비록 한글본


 


30여 점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징비록>서문의 “징비록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시작되는 도입부에 이어, 1부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다’에서는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임진왜란의 피난 중에 영의정과 도체찰사(군사령관)가 되어 7년여 동안 선조를 보좌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등 국난 극복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문서 및 유품들을 포함하여 개성으로 피난하는 도중에 영의정으로 임명된 교지, 도체찰사로서 사용했던 투구와 갑옷, 전쟁 중에 문서를 넣어 휴대하였던 유서통,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이 류성룡에게 시를 써서 준 부채 등이 소개되고 있다.


 


<징비록>초본(국보 제132호) 이외에 2종의 목판본 <징비록>과 책판, 그리고 목판본 <징비록>에 포함되어 있는 <진사록>, <군문등록>, <근폭집>초본(보물 제460호) 등이 소개되는 2부에는  ‘뒷날의 경계를 위해 <징비록>을 쓰다’에서는 <징비록>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소개된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그가 제안하여 작성한 문서나, 이에 선조가 결정하여 내린 문서 등을 모두 이면지를 활용해 필사해두거나, 명나라 책력인 대통력(大統曆) 등에 그 때의 감회 등을 적어두었다. 훗날 류성룡은 하회 옥연정사에서 이들 기록들을 참조하면서 그가 경험했던 감회 등을 서술하여 처음에는 <난후잡록>이라 하였으나, 『시경(詩經)』소비(小毖)편의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는 내용을 참조하여 최종으로 <징비록>이라 이름한 내용의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국립민속박물관 제3전시실에서는 안으로는 ‘효’를 바탕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진정한 ‘충忠’을 실천했던 류성룡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풍산 류씨 집안의 가족 이야기 “충효 이외 힘쓸 일은 없다”가 함께 열리고 있어 이번 전시와 연계하여 만나볼 수 있다.


 


<징비록>특별전은 8월 5일(수)부터 9월 30일(수)까지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Ⅱ에서 만나볼 수 있다. [허중학 기자]


 


 



 

[서울문화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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