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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현대미술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장르 경계의 모호성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조각가 에르빈 부름(Erwin Wurm, b. 1954-)에게 조각은 전통적인 조형물의 개념을 넘어 신체를 통한 행위, 그리고 물리적인 형상 없이 존재하는 개념도 조각의 범주로 정의하며 예술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수원시립미술관, 오스트리아 조각가 에르빈 부름 개인전인 《에르빈 부름: 나만 없어 조각》
에르빈 부름은 오스트리아의 빈과 림부르흐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동시대 조각가로 1980년대 후반부터 약 40년간 이어져 온 그의 작업은 모두 조각의 본질과 형식에 관한 탐구하며, 소비 지상주의, 비만, 이민과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모순과 불합리를 날카롭게 꼬집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말 일상적인 옷을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형태가 변화하거나 부피가 증감하는 모든 ‘현상’ 자체를 조각으로 보았다. 1990년대에는 자신의 신체를 소재로 하는 조각에서 시작하여 90년대 중반 이후 조각의 대상을 ‘행위’로까지 확장하였다. 작가는 이런 작업 과정에 대해 “어떤 작품들은 일상의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 혼란으로 나아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 《에르빈 부름: 나만 없어 조각》은 에르빈 부름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전방위적 활동을 조망하는 전시이자 작가가 제시하는 ‘조각’의 다층적인 의미에 주목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총 3개의 섹션(사회에 대한 고찰, 참여에 대한 고찰, 상식에 대한 고찰)으로 에르빈 부름의 작품 가운데 엄선한 61점의 조각들을 통해 그의 예술적 상상력을 추적한다.
1부(사회에 대한 고찰)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13 풀오버 13 Pullovers Series>(1991)와 <8일 만에 L 사이즈에서 XXL 사이즈 되는 법 From L to XXL in 8 Days>(1993) 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유쾌하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담아낸 조각들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부드러운 재질의 조각, 속이 빈 조각 등 다양한 재료를 통해 기존 조각이 지닌 무게와 양을 덜어내고, 녹아내리거나 부푼 형태로 현대 사회의 현상들을 재치 있게 은유한다. 그는 사람의 신체도 조각 일부로 바라보며 조각의 본질에 대한 변화를 모색했다.
에르빈 부름은 “음식 섭취를 통해 살이 찌고 빠지는 과정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먼저 겪을 수 있는 조각적 경험”이라고 말한다. 작품의 주된 내용은 거의 움직이지 말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는 사람의 몸도 하나의 조각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자동차와 집을 뚱뚱한 모습으로 의인화한 ‘팻 조각’ 시리즈(Fat Car Series)로 조각의 형식을 실험하는 동시에 소비 지상주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처럼 에르빈 부름에게 조각은 모든 ‘현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이자 사회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이다.
2부(참여에 대한 고찰)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조각에 대한 의미를 재정의 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먼저 간략한 지시 드로잉, 일상의 사물, 그리고 좌대로만 구성된 ‘1분 조각 One Minute Sculpture’은 작가가 국제적인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시리즈로 조각과 행위의 상호 관계성을 묻기 시작한 작품으로 조각에서 형태를 이루는 덩어리를 완전히 없애고 그 공간에 1분이라는 시간성을 담아 ‘행위’가 조각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에 나오는 “1분”은 ‘짧은 순간’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고 실제로 작품을 수행하는 시간은 10초가 될 수도, 2분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퍼포먼스 조각 Performative Sculpture’ 시리즈에서는 작가가 방문하는 지역의 건축물을 선택하여 미니어처로 제작하고 그 위에서 작가가 직접 퍼포먼스를 행한다. 이는 모든 것을 쉽게 버리고 바꾸는 오늘날을 꼬집어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관람객의 참여로 만들어진 조각들은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뒤집고 조각 개념의 확장을 가져왔다.
최근 작가는 추상 형태로 옮기는 과정에 집중하여 새로운 조각의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3부(상식에 대한 고찰)에서는 조각의 형식과 경계를 뛰어넘는 작가의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앞서 얘기했듯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는 평면도 ‘조각’의 범주에 속한다. 이렇듯 그는 사진도 ‘조각’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담은 <게으름을 위한 지시문 Instructions for Idleness>(2001)은 바로 ‘사진 조각 Photographic Sculpture’으로 분류된다. 이 연작은 작가가 직접 모델이 되어 게을러지는 법을 다각도로 풀어낸 사진 작업이다. 사진과 텍스트는 작가 특유의 유머와 재치를 잘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SNS 속 현대인들의 완벽한 모습이 사실은 전부 허구이며, 우리가 ‘거짓된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어 실제 모델의 신체 중 옷을 포함한 표면 일부분을 틀로 만들어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 한 ‘스킨 조각 Skins Sculpture’(2021) 시리즈는 조각이지만 마치 사람의 피부와도 같은 이러한 작업은 일반적인 조각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조각을 재정의 하고 있다.
에르빈 부름은 무형의 생각만으로도 조각을 만들 수 있다는 일반적인 조각과는 다른 작업 방식을 보여준다. 그의 발상은 일반인에게 상당히 생소하게 다가오지만 여러 예술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규정된 조각에 대한 해석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관점으로 현대미술을 느껴볼 수 있는 전시가 아닌가 싶다. 전시는 3월 19일(일)까지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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