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남북 이념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잊혀진 작가 월북작가 ‘임군홍’ 조명

예화랑, ‘임군홍_ Lim Gunhong, The painter’전
기사입력 2023.07.28 00:00 조회수 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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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홍의 차남 임덕진 선생

 

 

 

[서울문화인] 저희 집안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일종의 금기였습니다.” 월북화가 임군홍의 차남이자 네째 임덕진 선생의 말이다.

 

이념적으로 남북으로 분열된 이 나라 안에서 가족 중에 월북 한 사람이 있는 집안에서는 숙명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예술계도 마찬가지이다. 월북 작가는 비단 한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예술계에서도 철저히 잊혀 졌고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은 대부분 그 존재를 모르고 있다.

 

2015, 해방 70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0세기 한국미술의 대표화가이자 월북화가 이쾌대의 타계한 지 50년을 맞아 진행한 그의 회고전을 통해 왜 우린 이런 화가를 모르고 살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예화랑(강남구 가로수길 73) 김방은 대표가 월북화가 임군홍개인전을 한다는 초대글에 지난 12월 신문기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말을 그냥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를 빗대어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임군홍 작가를 세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의 작품의 이미지와 월북화가라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우리 미술사에서 저평가된 근대기 작가를 발굴, 재조명함으로써 한국 미술의 두터운 토양을 복원하고자 기획한 근대미술가의 재발견시리즈을 통해 임군홍이 새롭게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당시 전시에서 본 임군홍의 작품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임군홍 작품 5점은 1985, 월납북 작가 해금 무드가 고조되던 시기 당시 그의 개인전을 미술관에서 개최한 후, 유족(임덕진)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라 한다.

 

이번 예화랑에 전시 된 작품을 보고 단번에 몇 작품은 그때 보았다는 것이 떠오를 정도로 내게도 각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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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단,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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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풍경, 1940년대

 


월북화가 임군홍은 해방 후 1940년대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해방전 그는 중국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자유로운 화풍의 풍경화를 남겼다. 또한 그는 광고사를 운영하며 직접 그린 관광 브로슈어 도안 등의 아카이브를 통해 초기 광고디자인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1950년 가족과 이야기는 조금 차이는 있지만 월북한 것으로 들어나 이후 남한의 미술사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임군홍의 유화 작품은 약 130점에 이르는데, 이는 모두 1930년대 중반에서 1950년까지 약 15년 사이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화가들 중에서 이 정도 규모의 유화 작품을 남긴 이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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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홍(林群鴻, 1912-1979)

 


임군홍(林群鴻, 1912-1979)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치과에서 기공사로 근무. 경화양화연구소 등에서 미술을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입선했다. 1936년 녹과회를 결성하면서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일본인 은행장의 후원을 받아 만주에서 임군홍. 김혜일 2인 양화전을 성공리에 개최했다. 이후 한커우에 정착하여 광고사를 운영하는 한편,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풍경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 한국 화단에서 보기 드문 맑고 강렬한 색채로 중국의 이국적인 풍경을 표현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광고사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렸으나 운수부 월력사건으로 1950년 한국전쟁 직후 행방불명됐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맡았고 조선화가로 전향했다.

 

운수부 월력사건은 임군홍이 동료화가 엄도만과 함께 1948년 철도국의 달력제작을 의뢰받고 최승희(46년 월북)를 모델로 한 달력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모델이 북로당 간부 최승희이며 최승희가 쓴 갓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 갓끈은 소련 16연방을 의미하는 16개의 구슬. 갓 측면에는 조선을 더하여 소련 17연방을 의미하는 17개의 구슬, 최승희의 부채에는 삼팔선을 상징하는 선, 하단에는 소련 국기의 망치와 낫과 유사한 모양 등이 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약 4개월 간 옥살이를 하였다.

 

 

딘 소장이 써준 임군홍 탄원장 앞뒷면.jpg
딘 소장이 써준 임군홍 탄원장

 


임덕진 선생은 아버지(임근홍)는 성품이 워낙 인자하시고 남들에게 베풀기 좋아하며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했다. 당시 아버지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미군들까지 탄원서를 써서 485.10 총선을 앞두고 사면 복권되어 출소하셨다. 당시 감옥에서 아버님이 읽고 싶다고 영치품으로 넣어드렸던 일본책 서양미술사를 아직도 제가 보관하고 있다. 감옥에서 그 책을 내준 날이 1948328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날이 아버님이 출소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과거 국현에서 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화 79, 수채화 10, 드로잉 27, 파스텔 1점을 포함하여 총 117점이라는 작품이 전시장에 나왔다. 작품은 대부분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더불어 유족이 국현에 기증한 작품도 다시 이번 전시에 소개되고 있다.

 

이날 전시장에는 임군홍 화가의 아드님인 임덕진(1948) 선생이 직접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앞서 서두에서 얘기했듯 오랫동안 집안에서 금기시 되었던 아버지(임군홍)이 이제 대중 앞에 당당히 소개할 수 있어서 그런지 임덕진 선생님의 설명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을 반추하며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특히 작품 속 여인은 대부분 가족 혹은 친인척이라 설명해 주셨다. 작품 속 여인들의 당시에는 쉽게 볼 수 없는 복장과 당당함이 묻어난다. 이는 당시 부유했던 그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특히 임군홍이 월북 전 가족을 그린 그림 <가족>에서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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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아내상), 1937 / 여인 좌상, 193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6.가족,96x126.5cm,Oil on canvas,1950.jpg
가족,96x126.5cm,Oil on canvas,1950

 


작은 아들을 안고 있는 부인과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큰 딸을 그렸다. 부인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작은 딸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임군홍이 수집한 도자기들이 놓여져 있으며, 왼쪽 앞에는 임군홍의 집 마당에 피어있던 백합이 그려져 있는데 백합이 활짝 핀 것으로 보아 6,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임덕진 선생은 이 작품은 아버지가 남한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그림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북으로 떠나셨다. 저는 이 작품을 보면 아버지 그 자체로 여겨집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명륜동 집을 팔고 이사 나올 때까지 마루에 이젤 그대로 서 있었던 작품입니다. 어머니도 이 그림을 절대 놓지 않았다. ‘아버지 마지막 작품이니까 손 못 댄다고 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다.”그림 속에는 어머니와 큰누나, 그리고 제가 있다. 큰누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아 아버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둘째 누나는 늘 할머니가 옆에 끼고 있어서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장난꾸러기였던 당시 열 살 형 성태도 밖에서 노느라고 집에 없었던 것 같다.”, 또한 그림 속 조선 청화백자 두 점, 손잡이가 달려있는 큰 컵 등은 다 집안에서 쓰던 것들이다. 아버지가 모두 수집한 것들이다. 빨간 주칠을 한 테이블도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것이다. 특히 맥주 컵은 한커우에 살고 있던 독일 사람들이 맥주잔이었다고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1996년인가 한 컬렉터가 산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 혼이 깃든 작품이라며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제가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제 아들에게도 계속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그림이 우리 가족을 떠나는 순간까지... 어머니도 그랬지만 제 품에서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며 작품을 아버지와 동일 시 하였다.

 

그러나 테이블 위 도자기들은 임군홍이 떠난 후 이것을 팔아 가족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현재는 위스키 병만 남아 유족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 위스키 병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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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 초상, 22.8x15.8cm, Oil on paper, 1948 / 아들을 지켜주는 고양이, 21x14.5cm, watercolor on paper, 1948

 

 


<덕진 초상>은 임근홍이 아들 덕진을 100일 정도 됐을 때 그린 것으로 액자는 황금색으로 화려한 것에 반해 그림은 당시 크로키 화첩 두꺼운 표지 뒷면에 그렸다.

 

 

임덕진 선생은 아버지가 생전에 손수 선택하시고 주문하신 액자를 끼운 유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복원하려고 액자에서 꺼내다 놀랍고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림 뒤에 고양이를 그려 넣은 다른 그림이 겹쳐 있었다. 별도 서명까지 있었다. 아시다시피 고양이는 영물아닙니까. 사람이 보지 못하는 영혼도 본다잖아요. 초롱초롱한 고양이 눈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100일 된 둘째 아들의 얼굴을 그리며 부디 나쁜 기운을 쫓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아비의 마음이 오래오래 전해져오는 그림이다.”고 이 작품을 설명했다.

 

한편, 이번 전시를 준비한 예화랑 김 대표는 예화랑 전신인 천일화랑을 만들고 우리나라 산업미술의 원조 격으로 활동했던 외할아버지(이완석)의 삶을 추적하다. 처음 접한 임군홍이란 이름이지만 두 분 모두 태어난 무렵이 비슷했고 (임군홍-1912, 이완석-1915) 서울에서 살던 집도 똑같이 명륜동이었다는 대목에서 분명히 외할아버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였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임군홍이 일제강점기 중국과 경성에서 광고 회사를 했다는 것도 산업디자이너 1세대로 활약했던 외할아버지 삶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선생을 통해 임덕진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고 화랑에 오신 임덕진 선생님이 외할아버지 사진들을 보는 순간 완석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임군홍 선생님과 이완석 할아버지는 동료였다는 것을 알려주셨다.’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말한다. “임군홍 외에도 배운성, 이쾌대 등 주로 월북한 화가들은 1930-40년대 작품을 상당량 남한에 남겨 놓았다. 박수근, 이중섭 등 월남한 화가들이 이 시기 작품을 모두 북에다 남겨두고 내려온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에게 남겨진 이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양화계를 이해하고 실증하는 데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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