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탕평’, 글과 그림으로 소통한 영조와 정조의 이야기

영조 즉위 300주년 기념 특별전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기사입력 2024.01.18 00:00 조회수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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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분무공신전신상과 반신상, 1728년, 보물.jpg
박문수분무공신전신상과 반신상, 1728년, 보물

 

 

 

탕평(蕩平)’,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서울문화인] 탕평책’, 조선 후기 영·정조대에 당쟁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한 이 정책은 영, 정조를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말이다. 유교 경전 서경書經홍범洪範조에 나오는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를 풀면 뜻이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만들지 않아야 왕도가 탕탕하고, 무리를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어야 왕도가 평평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조말 동서분당 이후부터 시작된 당쟁은 왜란이 수습되면서 더욱 어지럽게 전개되어갔다. 파당간의 싸움은 왕실의 의례적인 문제부터 세자책봉·왕비책립과 같은 궁중의 변동을 계기로 삼아 다른 정파(政派)를 배제해 정권만 장악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더욱이 파당간의 싸움에서 성공하면 권세를 누리고 실패하면 찬축(竄逐 : 귀양보냄)과 주륙(誅戮)이 뒤따랐지만 파당간의 당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고 군주의 자의(恣意)가 당쟁을 조성하는 데 큰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왕권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탕평이라는 용어를 정치무대에 처음 제기한 사람은 1683(숙종 9) 박세채(朴世采). 그는 1694년에 영의정으로 또다시 탕평을 제기하였다. 그는 격렬해져 가는 노·소론간의 당쟁을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파당(派黨)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구호에만 그쳤다. 그것을 하나의 이념이나 정책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반은 조성되지 못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탕평이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확립된 것은 영조대였다.

 

영조는 당쟁의 폐해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을 실감하였다.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고 즉위하는 과정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신하들 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즉위 뒤에도 경종 독살설을 내세우며 그의 왕위 계승에 의혹을 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영조는 국왕이 중심이 된 황극탕평皇極蕩平(임금이 표준을 바로 세우면 만백성이 그것을 자신의 표준으로 받아들인다)을 추진하며 균역법 및 준천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진하도, 8폭 병풍, 작가 모름, 1783년 01.jpg
〈진하도陳賀圖〉 8폭 병풍, 작가 모름, 1783년, 비단에 색(제1-6면) 비단에 먹(제7·8면), 각 폭 54.0×152.0cm,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영조는 세제책립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의 시비로 노·소론간의 분쟁이 격심해 신임사화라는 당화(黨禍)를 몰고 온 폐해를 직접 경험한 장본인으로 탕평책은 이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나온 정치이념이요, 예방책이었다. 영조는 격렬해지는 당론을 수습하고자 인물의 현능(賢能)에 관계없이 파당에 따라 고르게 인물을 등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화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으며, 영조대 중반에 탕평국면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이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 진행하고 있는 특별전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12.8.-‘24.3.10.)2024년 영조英祖(재위 1724-1776) 즉위 30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하는 전시로 영조와 정조正祖(재위 1776-1800)탕평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글과 그림을 활용해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에 주목하는 전시다.

 

전시에는 영조와 정조가 쓴 어필(御筆)과 두 임금의 의도를 반영해 제작된 궁중행사도 등 18세기 궁중서화의 화려한 품격과 장중함을 대표하는 5488(국보 1, 보물 11, 세계기록유산 5,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건 포함)을 선보인다.

      

전시는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이루고자 글과 그림을 활용한 방법에 주목하며, 4부로 구성되었다. 1(탕평의 길로 나아가다)에서는 글과 그림으로 탕평의 의미와 의지를 전하는 서적과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영조가 자신의 국정 운영 방침을 널리 알리고자 서적을 간행한 일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소통 방식이다. 더 나아가 영조는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제작해 일반 백성에게까지 임금의 뜻이 전해지도록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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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재를 고루 등용해 탕평을 이루다)에서는 영·정조가 글과 그림으로 지지 세력을 확대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임금의 마음을 신하에게 친밀하게 전하는 시를 쓴 어필, 은밀하면서 명료하게 업무를 지시한 비밀 편지를 비롯하여 신하의 스승인 군사(君師)를 자임할 정도로 학문 수준이 높았던 정조가 주자를 존숭한 일면을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가 그린 <주부자 시의도>를 통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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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각에서 거행한 영조의 기로소 입사靈壽閣親臨圖〉,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제31·32면, 장득만張得萬(1684-1764), 장경주張敬周(1710-?) 등 4인, 1744년, 비단에 색, 43.8×67.6cm, 국립중앙박물관

 

 

  

3(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다)에서는 영·정조가 를 내세워 정당한 왕위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영조는 원로대신 모임인 기로소(耆老所) 입사 기념 그림에서 자신과 사도세자의 자리를 나란히 배치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정조는 좋은 글귀의 시호(諡號)와 존호(尊號)로 사도세자의 덕을 칭송했다. 그는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해 20년 간 노력해 반대세력을 설득하며 왕에 버금가는 존호를 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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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친정계병, 1785년

 


4(질서와 화합의 탕평)에서는 정통성 문제로 분열되었던 정치권 통합을 이룬 정조가 1795년 화성에서 개최한 기념비적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보여준다. <화성원행도> 8폭 병풍에는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질서를 이루고 백성은 편안한 이상적 모습이 구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상세히 소개해 정조의 제작 의도를 전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책으로만 소개된 <삽살개>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삽살개>는 영조가 아끼는 화원 화가 김두량金斗樑(1696-1763)이 그린 그림으로 영조가 탕평을 따르지 않는 신하를 낮에 길가를 돌아다니는 삽살개에 비유하는 글을 더해 탕평을 따르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뒷받침해준 박문수朴文秀(1691-1756)38세와 60세 초상화를 나란히 배치해 세월의 변화에 따른 얼굴 표현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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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살개尨狗圖〉, 그림: 김두량金斗樑(1696-1763) 1743년, 글·글씨 영조英祖, 1743년, 종이에 엷은 색, 35.0×45.0cm, 개인 소장,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 털이 복슬복슬한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고 있다. 삽살개가 이토록 사납게 표현된 이유는 그림 위 영조가 직접 쓴 시에서 알 수 있다.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아무 때나 짖는 삽살개는 영조의 눈에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으로 보였다. 영조는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가 맡은 임무이거늘 어찌하여 길에서 대낮에 이렇게 짖고 있느냐(柴門夜直 是爾之任 如何途上 晝亦若此)”라고 적어 탕평을 따르지 않는 신하를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삽살개에 비유했다.

 

 

이처럼 이번 특별전의 전시품들은 18세기 궁중서화의 대표작이자 영조와 정조의 의도와 고민이 담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시의 주제를 생각하며 서화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동시에 글과 그림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한편, 이번 전시에는 2021MBC 인기 사극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영조를 연기한 배우 이덕화의 음성으로 영조의 글이 녹음되어 해당 전시품 앞에 이덕화 배우의 음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전시는 310()까지 진행된다. [권수진 기자]

 

 

 

[권수진 기자 ksj939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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