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조선실 부분 개편 ‘대한제국과 근대’

기사입력 2012.06.01 17:26 조회수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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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상설전시관 조선실 중 한말 시기를 ‘대한제국과 근대’라는 주제로 새롭게 개편했다. 이번 개편 전시에는 올해 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안중식의 ‘백악춘효’(1915)와 채용신의 ‘운낭자상’(1914) 등 59건 61점의 근대 유물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사 통사 전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면서 아울러 근현대사 전시의 서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립박물관으로서는 의미 있는 시도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대한제국 시기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한제국의 근대적 면모를 부각시키고, 유물을 통해 근대라는 의미를 되새겨보며, 암울했던 역사 속에서도 현대까지 이어진 우리나라의 문화적 변화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전시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부는 대한제국과 근대적 의식의 성장, 문물의 도입에 대해 다룬다. 먼저 황제국가를 선포한 대한제국의 제도적 변화를 황제의 인장이나 훈장 등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였다. 근대적 생활 양식의 급속한 변화를 가져온 기차를 비롯하여 축음기, 사진기, 전화기 등의 신식 문물을 전시하였고, 이 시기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과 이미지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 이행기의 면모를 보게 하였다.


 


2부는 우리나라 근대 예술의 발아과정을 서양 화법이 도입되면서 전통회화가 어떻게 근대회화를 거쳐 현대회화로 이어져 갔는지를 알아본다. 안중식의 ‘백악춘효’와 채용신의 ‘최연홍 초상(운낭자상)’ 등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상억 기증 ‘이규상 초상화’는 사진술이 도입된 이후 전통 초상화 기법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3부는 근대 역사 속의 나를 조망해 볼 수 있도록 여러 주제의 사진을 이용하여 소리, 동영상, 입체경, 그림 맞추기의 다양한 전시 매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체험코너를 만들었다. 자유연애 등 도덕관념의 변모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가 가져온 당시 사회의 변화상은 딱지본 소설의 표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또한 안중식의 ‘백악춘효’를 바탕으로 하여 암울했던 고난의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근대한국인의 강인한 의지를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 가장 가깝고 밀접하게 연결된 근대라는 시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장이 될 것이다.


 


안중식 백악춘효 _등록문화재 485호
  


여름날의 백악산과 경복궁의 풍경을 그린 안중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안중식은 장승업으로부터 전통화법을 계승했지만 1881년(21세) 중국에 가서 서양화법의 기초를 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대체로 전통화법에 충실한 작품을 제작했지만 실경산수도 여러 점 남겼다. ‘백악춘효’에서 미점준법(쌀알모양의 점을 찍은 화법)으로 그린 백악산은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미점으로 입체감을 나타내려 한 점에서 전통의 현대적 계승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안중식(安中植, 1861~1919) 1915년, 1980년 입수)


 


이규상초상
  


19세기 말 무관을 지낸 이규상의 초상으로, 전통 관복을 입고 가슴에는 고종황제 망육순望六旬 기념장(1902)과 황태자 가례嘉禮 기념장(1907)을 달아 그 자체만으로도 시대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통초상화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큰 변화를 겪는데 이규상 초상에는 기법 면에서 두드러진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얼굴 묘사를 보면 왼쪽보다 오른쪽을 밝게 그려 빛의 원리에 입각한 서양의 명암법을 수용했지만, 좌우의 균형을 중시하는 동양초상화의 관례에 따라 명도차를 최소화하였다. 화문석의 문양을 뒤로 갈수록 작게 처리한 것도 서양화의 투시법을 채택한 것이다. (20세기 초, 2011년 이상억 기증)


 


최연홍
  


채용신이 그린 운낭자상雲娘子像이라고 널리 알려진 초상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기독교의 성모자상을 연상시키며 옷주름 묘사에 있어 서양화법의 영향이 엿보인다. 선(線)에 주로 의존한 전통 초상화와 달리 골이 파인 부분에 엷은 먹을 반복적으로 칠함으로써 입체감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개성이 결여된 얼굴과 치마 밖으로 살짝 드러난 버선발 표현 등 전통성도 뚜렷하다. 운낭자는 원래 평안남도 가산의 관기(官妓)로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군수 부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부상당한 군수의 동생을 치료해줬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기적妓籍에서 빼주고, 사후에 그 초상화를 평양 의열사義烈祠에 봉안했다고 한다. (채용신(蔡龍臣, 1850~1941)1914년, 1930년 구입)


 


알렌의 검안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알렌(H. N. Allen, 1858~1932)이 사용하던 검안경이다. 검안경은 눈의 질환 등을 살펴볼 수 있도록눈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만든 안과용 기구이다. 이 검안경은 1870년대 미국 뉴욕에서 개발되어 상용되던 것이다. (조선朝鮮, 1880년대연세대학교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딱지본소설_요지경
  


딱지본이란 책의 표지가 아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시장터의 국수 가격인 육전 정도로 한 권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육전소설’이라고도 한다. 1908년경부터 나오기 시작한 딱지본 소설은 1920~3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딱지본 소설은 파격적인 색상과 민화형식과 서양화 기법을 사용한 일러스트가 결합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청전』, 『춘향전』등과 같은 고전소설도 있었지만, 서양 세계에 대한 호기심, 자유연애 등 변화하는 도덕관념을 담거나 과학소설, 탐정소설 등 새로운 소재를 다룬 신소설이 등장하였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불어판 춘향전
  


고전소설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각색하여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 소설가 로니는 1890년에 프랑스로 간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도움을 받아 춘향전을 번역하였다. 감미롭게 묘사된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는 아시아 문학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이국적인 감성을 자극하였다. 이 책의 삽화에는 춘향과 이도령의 모습이 서양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로니의 번역본은 1999년 프랑스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프랑스(파리), 1892, 2012년 구입)


 


담배광고
  


파리 만국 박람회 한국관(1900년)
 
 


 


 


 

[서울문화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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