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국보로 지정

기사입력 2023.01.04 00:00 조회수 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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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익산 미륵사지 서탑 사리호 수습.jpg
익산 미륵사지 서탑 사리호 수습

 

 
 
 

[서울문화인] 백제시대 공예품의 정수(精髓)라고 알려진 보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를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보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 탑 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기둥)의 사리공(舍利孔, 불탑 안에 사리를 넣을 크기로 뚫은 구멍)에서 나온 유물로서, 639(백제 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 사리봉영기(金製 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사리외호(金銅舍利外壺) 및 금제 사리내호(金製 舍利內壺),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았던 청동합(靑銅合)을 포함해 총 9점이다.

 

 

1-5. 익산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금동제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jpg
익산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금동제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供養物) 등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것으로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 데 필요한 기구(器具)를 빠짐없이 갖추어 둔 것이라는 뜻에서 사리갖춤이라고도 한다.

 

 

사리장엄구 중 금제 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를 새겼으며,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에 대한 기원을 담았다.


 

1-3.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사리봉영기-앞).JPG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사리봉영기-앞)

 

 

1-4.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사리봉영기- 뒤).JPG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사리봉영기- 뒤)

 

  

특히 사리봉영기는 그동안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힌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사리장엄구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유물이다. 서체 역시 곡선미와 우아함이 살아있는 백제서예의 경향과 함께 절대 연도가 있는 유물이 부족한 삼국시대 서예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사리장엄구 중 금동사리외호 및 금제 사리내호는 모두 몸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독창적인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몸체의 알맞은 비례와 유려하고 생동감이 뛰어난 문양 등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사리장엄구 중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는달솔(達率) 목근(目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달솔이라는 벼슬(2)을 한 목근이라는 인물이 시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을 바탕으로 시주자의 신분이 백제 상류층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함께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 확인되어 희귀성이 높다. 녹로(轆轤, 그릇을 만들거나 문양을 넣을 때 사용하는 돌림판)로 형태를 만든 동제 그릇으로, 일부는 우리나라 유기(鍮器) 제작 역사의 기원을 밝혀 줄 중요한 사례이다.

 

 

1-6.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청동합 6점).jpg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청동합 6점)

 

 

문화재청은 국보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 모습 그대로 발굴되어 출토지가 명확하고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를 위한 절대적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와 백제 금속공예 기술의 역량을 응집해 탁월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으므로 한국공예사에 있어 위상이 높으며, 7세기 전반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한편 동아시아 사리공예품의 대외교류를 밝혀주는 자료로서 역사학술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판단되어 국보로 지정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권수진 기자]

 

 

 

 

[권수진 기자 ksj939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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