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옛 모습 찾은 광화문 월대와 현판, 월대와 현판 복원기념 ‘새길맞이’ 행사

기사입력 2023.10.16 00:00 조회수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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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지난 2006광화문 제 모습 찾기를 시작으로 그간 추진된 월대와 현판의 복원이 마무리되었음을 국민들께 알리는 광화문 월대 및 현판 복원기념행사가 1015() 오후 6시 진행되었다.

 

궁궐의 월대(越臺, 月臺)는 궁궐의 정전과 같이 중요 건물에 넓게 설치한 대()로로 주로 의례와 행사, 외교는 물론 백성과 직접 소통의 무대 등으로 활용되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월대는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돈화문, 덕수궁 대한문 등에서 확인되는데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른 경우는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_1923년경 SJ0000012018.jpg
1923년경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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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영건일기(景福宮 營建日記)의 기록과 1890년대 이후로 전해지는 사진자료에 따르면 광화문 월대는 길게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한 기단석과 계단석, 그리고 난간석을 두르고 내부를 흙으로 채워 만든 건축구조물이다.

 

광화문 월대는 지난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길이 8.3m, 너비 29.7m의 고종년간 유구가 일부 확인된 바 있다. 월대의 전체 규모(길이 48.7m, 너비 29.7m)를 확인하였고, 어도시설과 길게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기단을 축조한 모습 등 월대의 구조가 드러났다.

 

또한, 조사를 통해 퇴적양상이 자연층에서 조선전기 문화층(14~16세기)과 조선중·후기 문화층(17세기 이후), 월대 조성층(19세기)을 거쳐 근현대도로층(20세기)의 순으로 형성된 것을 확인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의 기능이 상실되며 방치된 채 관리되지 못하다가 고종년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월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차 철로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광화문 월대 유적 전경(원본).jpg
광화문 월대 유적 전경

 

 

복원과정 조사를 통해 고종년간 월대 축조 이후 크게 4단계의 변화과정이 있었음을 확인되었다. 1단계에서는 월대 축조 당시로 남쪽에 경계가 나누어진 3개의 계단이 존재했으며, 당시 월대의 평면형태는 역철자형이었다. 2단계에서는 중앙의 어도계단지가 경사로로 변화되고, 3단계에서는 경사로의 범위가 확장되고 계단이 동·서 외곽으로 축소 변형되었으며, 이 시기에 처음으로 단선(외줄) 형태의 전차선로가 설치됐다. 4단계에서는 전차선로의 복선(겹줄)화로 월대가 파괴되면서 난간석 등이 철거되고 광화문의 이건과 함께 도로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경복궁 월대는 1923년 사진에는 등장하지만 이후 전차선로의 단선 및 복선화로 월대가 훼철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지난 8월에는 마지막 퍼즐인 월대 어도(임금이 다니는 길)의 가장 앞부분을 장식하던 서수상(瑞獸像, 상상속 상서로운 동물상)으로 추정되는 석조각 2점이 호암미술관 내에서 발견되어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 측으로부터 기증받아 복원에 사용되었다. 또한, 동구릉(경기도 구리시)에서 보관 중이던 난간석 부재 등 50여 점도 이번 복원에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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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 내 보관 중이던 서수상

 


광화문 월대복원과 더불어 광화문 현판도 새롭게 고종 대 중건을 기준으로 복원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논란 속에 새롭게 복원된 현판은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추가 고증자료 확보(‘18. 12)되어 현판의 바탕은 검정색, 글자는 동판 위에 금박으로 재제작하고 단청안료는 전통소재 안료를 사용하여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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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제작된 광화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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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화문 모습(스미소니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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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化門 懸板 書寫官訓將林泰榮 墨質金字 以片銅爲畵 十品金四兩重塗之 銀匠 金景祿 崔泰亨 金友三 等所願納’ (景福宮營建日記, 乙丑年 十月 十一日) 광화문 현판 서사관은 훈련대장 임태영이다.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다. 동판으로 글자를 만들고 가장 좋은 금 넉 냥을 발랐다. 은장 김영록, 최태형, 김우삼이 원납했다. (경복궁영건일기, 을축년(1865, 고종 2) 1011)

 

경복궁 중건 시 궁궐 4대문은 임태영(광화문), 이경하(건춘문), 허계(영추문), 이원직(신무문) 등 모두 將臣(무관)들이 썼다는 점이다.

 

이날 광화문 월대와 현판 복원기념 새길맞이행사에는 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 사전 신청한 국민 500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기념식은 오후 5시에 광화문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광화문답’(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에 이어, 오후 6시에 시작된 본행사에서는 광화문 완성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살린 광화등점등식(월대와 현판 공개), 광화문 개문 의식, 새길맞이단과 광화문 월대 행진과 약 130미터 가량의 광화문과 담장을 배경으로 프로젝션 미디어쇼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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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행사후에는 참석자들은 월대를 걸어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입장, 흥례문 광장에서 수문장 도열과 취타대 연주를 관람과 근정전에서의 문무백관 도열을 즐겼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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